<벽오금학도_해냄_이외수>
중학생 시절 유독 기억에 남는 건 등하교길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설광고였다.
광고하던 그 소설이름을 외워 뒀다가 학교 앞에 구립도서관에서 빌려보곤 했다.
라디오 광고로 이름을 외워둔 소설들이 대출로 인해 없으면 다른 책을 빌려 읽었기 때문에 문학, 비문학을 가리지 않고 읽을 수 있어 사고가 확장 되던 시기로 기억된다.
당시 대출 일순위 였던 소설들은 앨런폴섬의 '모레', 김용의 '영웅문', 하퍼리의 '앵무새죽이기', 이우혁의 '퇴마록' 등 이었다.
소설 속 사람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해서 몇 번을 되돌아와 읽다가 어느 정도 플롯을 이해하게 되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몰입하였다.
지금은 흥미로운 것이 넘치는 영상의 시대라 활자와 라디오가 주는 상상력이라는 산물은 거의 사라졌다.
소셜사이트를 통한 뉴스 몇자 빼고는 글자를 읽는 시간이 거의 없다 시피하다보니 활자가 주는 몰입은 찾기 힘들다.
집 서재에 아내가 젊은 시절 사서 보았던 소설 몇 개가 꽂혀 있었다.
어느 주말에 아이 책을 놓을 공간을 만든다며 버리겠다고 하였다.
일단 읽고 버리자며 내 방에 가지런히 쌓아두었는데 그 중 한권이 벽오금학도였다.
'하악하악', '외뿔', '글쓰기의 공중부양' 과 같은 비소설 책으로만 만난 이외수 작가의 소설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끌었다.
소설가로 명성있는 이외수의 소설 하나 읽은 것이 없으면서 그가 나오는 예능을 보아왔던 것은 마치 요즘 10대들이 90년대 가수를 TV예능에 나오는 모습만으로 개그맨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 일 것이다.
책에서는 주인공 강은백(姜銀柏)이 어릴 때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은 어떤 처지인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설명한다.
그는 9살때 신선이 살던 곳에서 3일간 머무른 이후 세상에 돌아와서는 정착하지 못하고 30여년간 떠돈다.
다시 선계(仙界)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선계에서 받아온 족자 그림 하나를 짊어지고 자신을 돌려보내 줄 기인들을 찾아 다닌다.
탑골공원에서 정신병원까지 세상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인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인을 이런 사람들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을 보며 진정 뛰어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이 글 속에 녹아들어 있음을 느낀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 시대상을 적어두었다.
선계와 이어줬던 무영강에는 온천관광단지가 들어서고, 등선폭포로 오르는 소로는 기념품과 음식파는 집이 들어차있다.
옛것을 배척하고 새것을 숭상한다.
미국제품이 점령하고 고유의 전통은 변두리로 밀려나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미국의 하나의 주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는데 책에도 이런 것이 여러 형태로 묘사된다.
세상이 더럽다 말하는 것과 소중하다 말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는 문장도 있다.
"불교에서는 파리를 더럽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행복이란 관상이나 손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입버릇과 같은 현대인의 자조와 헛된 자존심을 대변하는 말도 있다.
"경찰관을 뭘로 아는거야."
태함산에서의 결말을 보고 책장을 덮으면서 나도 몰래 새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당했다."
생각의 여지를 남기는 마지막을 예측 못한 건 아니었지만 매번 깔끔한 결말을 보여주던 영상들만 보다보니 그런 가보다.
그간 떡밥을 회수하고 복선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영화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끼기만 하면 그 어떤 대상이라도 완전합일이 가능한 편재(遍在)와 신통력의 비밀로 노파가 알려주는 "배가 지나가면 물결이 일고 바람이 지나가면 나뭇잎이 흔들린다."라는 말은 남과 비교하며 내 것을 축재하는 것을 살아가는 이유로 삼는 범인들에게 주는 메시지 일 것이다.
다음장이 궁금해지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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