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새로운 변곡점 _여성 참정권의 확대
참정권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바꿀지를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는 최소한의 권리이다.
나와 생각이 비슷한 대표자를 내 손으로 뽑아야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참정권은 그저 주어진 적이 없다.
귀족들은 왕권과 싸워 정치 권리를 찾았고 부루주아는 귀족들과 싸워 참정권을 얻었으며 노동자들은 부루주아와 싸워 참정권을 얻었다.
현재 성인이라면 누구나 한표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지루한 투쟁의 결과인 것이다.
여성의 경우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면서도 100여년 전 까지 정치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영국에서는 산업화 혁명 이후로 여성의 사회활동 비중이 높아져왔지만 참정권 요구는 번번이 묵살되었다.
1860년대부터 의회에 상정된 안들이 부결되자 에멀린 팽크허스트를 위시로 여성들은 1903년 여성사회정치연맹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를 조직하여 1908년 부터 과격 시위를 하였다.
참정권이라는 '서프리지'에서 여성형 접미사 '트'를 붙여 서프러제트(suffragette)라고 불린 그들은 지속적으로 권리를 주장하였다.
이를 좋게 보지 않던 남성들은 참정권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서프러제트들에게 억지로 호스를 꽂고 강제로 음식을 주입시키는 등의 가혹한 압제를 행하기도 하였다.
1913년 WSPU소속 에밀리 데이비슨이 경마장 1인 시위 중 말에 치어 사망하자 분노한 여성들이 거대한 시위행렬을 이뤘고 건물들을 파괴하였다.
1914년 부터 정부와 합의안을 만들어 나가며 점진적으로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한 후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918년 2월 인민대표법을 통해 정치 참여를 이뤄냈다.
이때 주어진 권리는 30세 이상 여성에게만 주어진 선거권이었지만 1928년에 개정을 통해 현재와 같이 남녀동일 21세 이상부터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의 여성 참정권(Women's suffrage in the United States)은 주와 지방에서 1800년대 초 부터 점진적으로 요구되고 있었다.
미국은 각 주별로 법률 제정이 자유로웠기에 뉴저지주의 경우 재산을 가진 미혼 여성에 대해 1776년부터 1807년까지 투표권을 인정하는 등 차이가 있었다.
연방정부 차원에서는 1844년 6월 전원 남성으로 구성된 자유당이 대선 승리를 위해 ‘여성 참정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해 7월에는 뉴욕주 세네카 폴즈 컨벤션에서 미국 여성의 참정권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요구가 이뤄졌다.
1850년대의 ‘전국여성권리 컨벤션’(National Women's Rights Convention)과 루시 스톤은 여성 참정권 청원을 여러 주에 했으며, 스톤은 1853년 매사추세츠 헌법 컨벤션에서 많은 의원들 앞에서 연설을 하였다.
1861년 4월부터 1865년 4월까지 미국을 뒤흔든 남북 전쟁이 끝나고 1865년 전국여성권리위원회(National Woman's Rights Committee)가 의회에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시민권을 축소시킨 여러 주의 조치를 금지하기 위해 미국 헌법을 수정하라는 청원을 하였다.
여성이 아니라 흑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미국 수정 헌법 제15조의 비준을 지원해야 하는 지에 대한 의견불일치로 인해 수전 B. 앤서니와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이 설립한 ‘전국 여성 참정권 협회’(National Woman Suffrage Association, NWSA)와 루시 스톤과 줄리아 워드 하우가 세운 미국 여성 참정권 협회(American Woman Suffrage Association, AWSA) 2개의 경쟁 단체로 갈라졌다.
두 단체 모두 처음에는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는 수정 헌법 제16조 운동을 관철시키기 위해 활동하였지만, AWSA는 점차 주와 지방에서 선거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연방의 조치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점점 방향을 바꾸었다.
1889년, 이 단체들은 ‘전미 여성 참정권 협회’(National American Woman Suffrage Association)로 통합한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1917-1918)하면서 영국처럼 여성이 전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고 1920년 미국 수정 헌법 제19조가 통과되면서 참정권을 이뤄냈다.
이 헌법에서는 선거를 할 수 있는 미국 시민의 권리가 미합중국이나 어떠한 주에서도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정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무렵인 1919년 초창기부터 임시헌장에 남녀평등을 표방해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였지만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고 사회는 전근대적 사고 방식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어 여성이 목소리를 높일 수 없었다.
1945년 광복을 하고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미국의 정치체계가 도입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에 근거하여 여성 참정권이 자연스럽게 보장되었다.
전면적인 여성참정권이 가장 먼저 허용된 국가는 1894년에 선거권을 보장한 뉴질랜드이다.
이어 호주 의회가 1902년 여성을 포함한 모든 호주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법을 통과시키며 호주에서도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었다.
여성이 정치 일선에 참여하는 진정한 의미의 참정인 피선거권은 핀란드(당시 러시아 제국 치하 핀란드 대공국)가 1906년 선거법을 제정함으로써 처음 확립되었고 1907년에 19인의 여성 의원이 선출되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던 프랑스는 의외로 여성 참정권에 대해서는 허용이 늦었다.
여성의 집회, 정치참여 등이 금지되어 왔는데 미국, 영국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말엽부터 여성 참정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제 1차와 제 2차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야 1946년 프랑스 법에 남녀가 평등한 참정권을 갖는다고 명시되었다.
이슬람권에서는 구 소련 지역에서 1917년부터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으며, 1920년 알바니아, 1930년 터키가 인정하였다.
유럽에서는 국가 단위에서는 리히텐슈타인이 1984년에 마지막으로 여성참정권이 인정되었고, 스위스의 아펜첼이너호덴 주가 1990년에 여성참정권을 마지막으로 인정하였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최근에 여성참정권이 인정된 나라는 2015년에 허용한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여성의 사회적 권리가 남성만큼 올라간 것은 양차 세계대전에 기여한 여성들의 헌신의 영향이 크지만 백년이상 기득권에 맞서 투쟁해 온 진보여성운동가들의 희생과 여성들의 지지가 없어서는 절대 이뤄지지 못할 일이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