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동북아] 흉노의 전성기를 연 지도자 _선우묵특

Jeffrey Choi 2021. 9. 4. 20:47

흉노(匈奴)족은 중국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4세기부터 역사서에 오를 정도의 존재로 각인된다.

현재 몽골이 위치한 스텝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유목국가였고 철기를 일찍부터 도입해 사용하고 있었다.

 

춘추시대를 통일한 진나라는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만리에 달하는 북방장성을 쌓았고 이는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1987년 등재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 등 역사서에는 흉노족의 최전성기가 2대 선우(單于)인 묵특(冒頓) 때로 기록되어있다.

묵특은 묵돌이라고도 부르는데 기원전 234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09년 흉노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선우가 되고 기원전 174년 죽는다.

 

묵특은 흉노제국의 1대 선우인 두만(頭曼)의 아들이었다.

두만은 태자의 위치에 있는 묵특보다 묵특의 이복동생을 후계자로 세우고 싶어했다.

당시 이웃국가인 월지가 강성하던 시기라 현재 간쑤성 일대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을 차지하며 인질을 요구하자 묵특을 볼모로 보낸다.

 

두만은 묵특이 월지에 볼모로 있음에도 얼마후 병사를 이끌고 월지를 친다.

이 혼란을 틈타 묵특은 천리마를 훔쳐타고 흉노로 돌아온다.

 

내심 태자가 죽기를 바라던 두만은 아들의 용맹함에 1만 군사를 주어 장군으로 삼는다.

묵특은 자신에게 불리한 이 모든 사태를 파악하고 아버지를 살해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심복들을 뽑아 기마궁술을 연마시키고 숙련공을 시켜 소리나는 화살인 명적(鳴鏑)을 만들었다.

 

심복들에게 명적으로 자신이 어떤 것을 쏘더라도 일제히 그 목표물을 향해 활을 쏘도록 훈련시켰다.

짐승을 쏘면서 연습하는 것이 완벽해지자 묵특은 자신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몇몇 부하들이 화살을 쏘지 않았고 이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된다.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부인과 아버지의 말을 죽이며 병사들과 합을 맞춘 묵특은 기원전 209년 어느날 사냥터에서 두만을 향해 명적을 날리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오른다.

 

이때는 진시황이 죽은 다음해로서 중국전토는 다시 곳곳의 반란으로 인해 전쟁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흉노는 즉시 주변 강국들과 화친한다.

동호와 월지와 같은 국가들이 아버지를 처치하고 선우에 오른 묵특을 얕보며 공격할 명분을 찾았기 때문이다.

 

동호에서는 묵특이 선우로 즉위하자마자 사자를 보내 천리마를 바칠 것을 요구한다.

흉노의 세력에서도 보기 드문 천리마였기에 모든 신하가 반대하였다.

그러나 묵특은 말 한 필에 두나라간의 화친을 망칠 필요가 없다며 천리마를 내어준다.

기고만장한 동호는 그 후 묵특이 아끼는 후궁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흉노의 신하들은 군주의 아내를 요구하는 무례한 행위에 펄쩍 뛰며 화를 내었지만 묵특은 여자 하나로 이웃나라의 미움을 살 수 없다며 아내를 동호로 보낸다.


그 다음 동호가 요구한 것은 동호와 흉노 사이의 구탈지라는 땅 천여 리였다.

이 곳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은 황무지라 묵특의 신하들은 땅을 주어도 손해볼 것이 없으니 이번에도 화친을 위해 땅을 내 주자고 말한다.

 

이에 묵특은 크게 성을 내며 "땅은 국가의 근본이거늘 어찌 함부로 내어 줄 수 있는가?"라며 땅을 주자고 말한 신하들을 참하고 기원전 206년 동호 정벌에 나섰다.

 

그간 흉노의 호락호락한 모습에 경계를 풀고 있던 동호는 흉노가 기병과 보병 30만명으로 진격하자 10만으로 대응하였다.

묵특은 가볍게 동호를 격파하고 요동까지 진격한다.

 

동쪽의 우환을 없애자 서쪽으로 진군하여 월지에게 이전에 빼았겼던 땅인 하서주랑을 되찾고 그들을 멀리 쫒아낸다.

이후 남쪽의 누번과 백양을 병합하고 선대에 진에게 빼았겼던 오르도스 땅을 수복한다.

북쪽의 혼유, 굴야, 정령 을 복속시켜 몽골의 초원지대를 전부 제패하고 마침 중국을 통일한 한에 칼을 돌린다.

 

기원전 202년 한고조(漢高祖) 유방이 비로소 중원을 통일하고 한왕(韓王) 신(信)을 보내 흉노의 공격을 막게하였다.

대(代)지방의 마읍(馬邑)에 도읍을 정하고 흉노에 대항하던 신은 흉노의 포위와 이간책으로 인해 항복한다.

한왕의 항복에 충격을 받은 한고조 유방은 흉노가 남쪽으로 태원(太原), 진양(晉陽)에 이르자 기원전 200년 친히 출병한다.

 

때가 마침 겨울이라 몹시 추워 한나라 병사들이 동상으로 고생하는데도 한나라는 32만의 병력으로 흉노를 추격하였다.

묵특이 약졸들로 흉노땅 깊숙이 한나라 병사들을 유인하였고 유방의 군대는 백등산에 들어가 진을 쳤다.

 

묵특은 40만의 기병으로 백등산(白登山)을 7일 동안 포위하자 한나라 군은 군량이 다하여 몰살의 위기를 맞았다.

유방은 신하 진평의 계책으로 몰래 사자를 보내 묵특의 부인에게 후한 선물을 보냈다. 

사자는 선우가 한나라를 쳐부수면 한나라에 있는 수 많은 미인들이 선우를 모시게 되니 그리 되면 부인의 처지가 딱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이것이 먹혀 부인은 묵특에게 “두 나라의 임금은 서로 곤욕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 곳은 선우가 끝내 살만 한 곳은 아닙니다. 또 한왕에게도 신(神)이 있는 것이니 선우는 살피십시오”라고 진언하였다.

묵특은 부인의 말을 듣고 한쪽의 포위를 풀어주었다. 

철수는 했지만 이번 전쟁으로 한나라는 군사의 열에 일곱은 동상으로 손가락이 잘려나갈 정도로 비참하게 패배하였다.

흉노는 한나라와 화친을 맺으면서 매년 흉노에게 솜, 비단, 곡식, 술을 보내고 공주를 선우의 부인으로 바치도록 하였다.

 

1.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2. 한과 흉노는 형제의 의를 맺는다.
3. 한나라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낸다.
4. 한은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비단을 보낸다.

 

기원전 195년 한고조 유방은 유언으로 "흉노와 전쟁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흉노는 기마궁사를 필두로 한 기마전술로 주변국들에게 무서운 존재가 되어있었다.

유방 사후 한나라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여태후(呂太后)에게 묵특은 서신을 보낸다.

 

"당신은 홀로되었고 나도 혼자인데 둘다 즐거운 일이 없으니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것을 취하는 게 어떻겠소?"

(陛下獨立 孤偾獨居 兩主不樂 無以自娛 願以所有 易其所無) 라는 내용의 서신을 받은 여태후는 매우 분개하였지만 흉노 정벌이 현실상 불가능하다는 중신의 만류에 화를 가라앉히고 답신을 보낸다.

"하늘이 내린 선우께서 저를 부르시니, 응해야 마땅하겠으나, 저는 이미 늙어 기력이 쇠하고 머리와 이도 빠져버렸습니다. 다만 선우께서 즐길 수 있도록 황제의 수레 두 대를 보내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흉노는 남쪽의 한나라를 속국형태로 두고 이후에도 조공을 받으면서 주기적으로 한의 영토에서 약탈을 계속했다.

 

선우묵특은 흉노를 동쪽으로 예맥, 북쪽으로 예니세이강 상류, 서쪽으로 알타이를 넘어서고 남쪽으로 중국의 오르도스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