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국의 역사상 최고부자_환관 유근
명나라는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1368년에 세운 나라이다.
그후 9대황제 효종 홍치제 주우탱까지 태평기가 이어졌다.
홍치제의 장남 주후조(무종 정덕제)가 15살의 나이로 1505년 6월에 재위하자 나라운영은 막장을 달리게 된다.
정덕제는 황태자시절부터 자신을 모시던 환관 유근(劉瑾)에게 정사를 맡기고 별궁을 지어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유근은 황제에게 매일 사냥과 가무, 연회를 준비하고 유흥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황제의 신임을 받자 궁중연회를 담당하는 종고사를 관장하고 황제의 문서 결제를 관리하는 장인태감의 자리에 오른다.
홍치제가 폐지하도록 한 환관조직을 계속 운영하면서 그들을 수족처럼 부리며 정사를 독단으로 처리한다.
그걸 보고 있던 신하들이 줄줄이 상소를 올려도 꿈쩍않던 황제는 양원이라는 천문을 담당하던 관리가 별자리 문제를 거론하며 상소를 올리자 유근을 북경에서 남경으로 보내기로 한다.
이런 황제의 뜻을 이부상서로 있던 초방으로부터 듣자 유근과 그를 보좌하는 환관들 총 8명은 황제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는다.
황제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하자 자신을 쳐내려고한 신하들을 숙청하고 환관 정보 정치를 더 강화한다.
이때부터 기존에도 해오던 매관매직을 대놓고 하는데 유근을 만나기만 해도 돈을 줘야하는 배면례도 시행하였다.
배면례에는 최소 은자 천냥이 필요했는데 당시 은자 한냥이면 쌀 2석(1석 94.4kg)을 살수 있었다.
이는 현재 물가로 1억원에 달한다.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벼슬을 얻을 수 없었으며 승진도 할 수 없었다.
관리들이나 관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북경에 오면 가장 먼저 유근을 만나려고 하였다.
뇌물을 바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환관으로 구성된 감찰반을 보내 갖은 핑계로 관직을 박탈하고 매를 치고 유배를 보냈다.
이런 유근의 악랄함에 목숨을 건 반란과 상소가 이어졌는데 모두 저지당하다가 결국 1510년 주치번의 난으로 6년간의 유근의 천하가 끝난다.
황족 안화왕 주치번(朱寘鐇)이 유근 처단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황제는 섬서 일대의 군인인 양일청(楊一淸)을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환관 장영을 군을 감찰하기 위한 직책인 감군(監軍)으로 함께 보내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이들은 반란을 18일 만에 진압하고 황제에게 보고하는데 사로잡힌 주치번이 반란을 일으킨 과정을 설명하면서 환관 장영은 유근의 모반을 고발한다.
유근의 대죄 17가지를 들은 정덕제는 즉시 유근의 집을 압수 수색하였고 그의 집에서 엄청난 재물과 보석, 황제의 용포와 옥대등이 발견된다.
금은 24만정(1205만냥, 약400여톤), 은이 500만정(2억5천만냥, 약8,200여톤) 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명나라 조정의 국고 수입의 10배가 넘는 규모였다.
황제는 유근을 능지처참 형에 처했는데 3일간 4,780여회 살을 발라내어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중국 역사상 가장 부자가 사람들의 고혈을 빨며 치부한 것이라는 점이 현재 중국인들의 돈을 숭배시하는 문화에 상호영향을 주고 있지 않는가하는 의심이 든다.
모든 이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가치 중심의 부의 축적이 이뤄지고 이는 곳간에 쌓이기 보다 또다시 좋은 환경과 문화 정착을 위해 순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