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고려의 충신 _길재

Jeffrey Choi 2022. 2. 14. 10:11

길재(吉再)호가 야은(冶隱)이고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1353년에 구미에서 태어났고 1363년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처음 글을 배웠다.

1370년 상산(현재 경북상주)의 행정책임자였던 박분(朴賁)에게 《논어》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하였다.

관료로 있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1374년 생원시(生員試)에, 1383년(우왕 9)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고, 그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결혼하였다.

서른이 넘은 1386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청주지방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사관인 청주목(淸州牧) 사록(司錄)에 임명되나 부임하지 않았다.

1387년에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냈다. 

1389년(창왕 1)에 종7품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되었다.

고려 우왕의 죽음이후 1390년에는 고려의 쇠망을 직감하고 늙은 어머니를 보살핀다는 구실로 사직하였다.

죽은 우왕을 그리며 마음으로 3년상을 행하였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李芳遠)이 길재를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임금인 정종이 가난하지만 당당한 그의 충절을 높이 사고 나서 길재의 이름이 알려졌다.

1402년(태종 2)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식 장례법을 따르지 않고 성리학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한 뒤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서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

산골에서 검소하게 살던 그는 1419년에 세상을 떠났고 금오산에 안장되었다.

야은 길재 (출처: 금산역사문화박물관 홈페이지)

그는 평생 가난을 벗삼아 살았으며 성리학을 탐구하고 실천하였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지극하며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아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인 김숙자(金叔滋)와 김종직(金宗直) 부자를 비롯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의 사람파로 학맥이 이어졌다.

조선 숙종때 지방 유생들이 길재를 기리기위해 지은 청풍서원(淸風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은집》 《야은속집(冶隱續集)》, 언행록인 《야은언행습유록(冶隱言行拾遺錄)》이 있다.

길재가 지은 시조로는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가 있다. 

그의 가문과 벼슬이 별볼일 없어 추숭을 하여도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없었기에 조선왕들도 그를 충신대우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