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 속 우크라이나 대기근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1932년~1933년에 스탈린 치하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발생한 대기근이다.
이 기간동안 소비에트연합(이하 소련) 전역에서 기근이 발생하였는데 작게는 600만명에서 많게는 1,500만명의 인구가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우크라이나에서만 350만명이 굶어 죽었기에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Holodomor) 즉, 기아를 통한 대량살인(Mass killing by hunger)이라고 명명된다.
원래 우크라이나는 민족주의가 강하여 소련과 함께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1917년 2월과 10월에 있었던 러시아 혁명 이후에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8년 3월에 맺어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도 우크라이나를 어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17년 11월부터 1922년 10월까지 이어진 러시아의 내전인 적백내전 당시 백군의 주요 기지가 되어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적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해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1924년 1월 21일 소련을 통치하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정권을 잡는다.
소련 초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제정책이 집산화를 중심으로 하였는데 농토 국유화가 핵심이었다.
그간 가족 위주 소농 경영을 해오던 소련 각지의 농민들은 농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련의 관료들에 의해 농장을 뺐겼다.
사회의 개편과 산업화라는 체제 전환으로 전문성이 결여되자 농업생산성은 급격히 떨어졌다.
토질이 비옥하여 생산량이 많았던 우크라이나는 이런 정책에 격렬히 반발하였다.
집단화로 재산이 빼앗길 위기에 몰린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은 가축을 잡아버리고 멀쩡한 밭을 갈아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60년대에 흐루쇼프 시대에도 우크라이나의 육류와 낙농, 채소와 같은 농산물의 생산량이 1920년대 만큼도 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1933년 1월 초, 우크라이나와 접경한 몰도바의 7개지역부터 기근이 시작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중부 체르카시와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집단적인 영양부족 사태와 기근이 발생했다.
2, 3월 한파가 한창인데 뜬금없이 중동부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 주와 키이우에서 장티푸스와 말라리아가 창궐하였다.
3월 우크라이나 집단농장의 절반은 곡물배급이 중단되며 우크라이나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대기근을 맞았다.
농민들은 식량과 동물사료가 부족해지자 남은 가축을 도살하며 버텼다.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배를 곯다가 굶어죽거나 질병으로 쓰러져 죽어갔다.
6개월 만에 기근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던 우크라이나 북부 체르니하우까지 확대되었다.
연말까지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 3천2백만명 중 약 480만이 죽어나갔다.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식인 사례가 발견되었고 이런 기근을 피해 폴란드나 루마니아로 달아나다 소련국경군의 총격에 죽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소련은 대기근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비밀에 부치면서 상황이 심각한 우크라이나, 북캅카스, 돈강 유역에 대한 출입을 봉쇄하였다.
외부인의 유입뿐 아니라 굶주린 농민들이 외부로 나가는것 또한 통제했다.
이들의 이탈으로 지역이 텅비어 식량 생산에 차질을 빚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탈출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잡혀 돌아왔고 대부분이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대기근 기간동안 소련은 공출량을 1/3로 감축하기도 하였으나 애초에 공출량이 과도하게 높았고 1932년 흉작으로 인해 소출이 감소하여 공출량을 채우면 먹고 살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농사 지을 말과 소는 다 잡아먹었고 효율없는 집단농장의 소출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대기근이 지나간 후에도 굶는 것은 예사이고 소련의 차별을 받던 우크라이나 인들은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진 당시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자 환영을 하는 웃지 못할일도 벌어졌다.
슬라브인들을 열등한 존재로 보던 독일이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고 당시 인구의 1/6을 죽일 정도로 악랄한 짓을 하자 좌절에 빠진다.
독소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났지만 우크라이나 인들은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음에도 강제 소출로 인해 식량부족을 겪었다.
2차세계 대전이 끝난 후 스탈린이 죽는 1953년 3월까지 어려운 삶을 이어나가야했다.
소련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살아가던 우크라이나는 이후 우크라이나 인근 출신인 흐루쇼프가 집권하여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이고 크림 반도를 떼어 우크라이나에 주는 등의 행적으로 보인 덕분에 소련에 대한 반감이 많이 감소되었다.
이 때 흐루쇼프가 땅과 인구를 우크라이나에 편입시키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갈등은 2022년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잘못된 정책과 자연재해가 결합되어 나타난 참사이다.
우크라이나 법원에서는 무리한 공출, 어설픈 식량수급계획, 강제적인 제도변경 등이 대기근의 원인으로 보고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학살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위정자들은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새겨두고 실정을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