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8월 26일 미 국무부 W.번디 차관보에게 주한 미국대사인 W.G.브라운이 아래와 같이 시작하는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한국인들과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아니고선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한국의 군대가 움직이도록 하며 모든 중요한 경제적 결정에 참여한다. 경제기획원 중앙의 은밀한 곳에는 항상 미국인들이 있다."
편지의 내용에는 상호보완적이고 비정상적으로 가까운 좋은 한미관계가 어떻게 두 주권국가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좀 더 정상적인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었다.
동맹은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을 때 맺는 것이다.
동맹을 맺고 있다고 해서 둘의 사이가 평등한 것도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동맹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현대의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는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하였지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미군이 다시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주한미군의 지위에 대한 협정(SOFA)이 쟁점화되었다.
1952 ~ 53년 미국과 한국은 대한원조정책에 관한 협약을 맺는다.
미국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져가는 대신 군사원조를 주겠다고 하였다.
흔히 말하는 한미동맹은 1954년 한미합의의사록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1961년 2월에는 한미경제기술원조협정을 맺었으나 한국에서는 반미시위가 일어났다.
미국에서 지원하는 원조금을 한국정부가 구호, 재건, 부흥에 쓰려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군사원조자금을 보내는 것인데 이 돈을 군대유지에 쓰지 않으니 막을 수 밖에 없기도 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과 이후 베트남 파병으로 한미관계는 허니문이라 불릴만큼 달콤했다.
여기서 들어온 외화로 1970년대 부터 중화학 공업을 발전시켜 한국은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와 76년 코리아게이트 79년 주한미군 철수 선언으로 안 좋아졌다.
이후 92년 윤금이씨 살해사건, 2000년 이태원 접대부 살인사건을 계기로 SOFA 개정 운동이 전개되어 2001년부터 미군 범죄자를 기소 시점부터 한국 정부가 인도하는 쪽으로 SOFA 규정이 개정되었다.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으로 반미시위가 일어나고 2007년 한미FTA 체결 내용이 불합리하다고 해서 촛불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2016 ~17년에 북한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한 주한미군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배치에 대한 찬반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롤러코스트를 타온 한미동맹관계는 앞으로도 많은 갈등을 남길 것이다.
중국이라는 잠자던 사자가 깨어난 지금 한국은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의 신세이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지속해 가는 한 미국과의 관계는 원만해야 한다.
어쩔 수 없다면 국제질서 속에서 다른 국가들이 미국과 어떤 관계를 맺고있는지 살피면서 신중하게 줄타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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