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폴란드의 자랑 _프레드릭 쇼팽

Jeffrey Choi 2022. 2. 5. 10:15

쇼팽은 야상곡(녹턴) 20번, 피아노 소나타 2번, 피아노 협주곡 1번, 강아지 왈츠, 환상 즉흥곡 등 수많은 곡을 작곡하고 연주한 피아니스트이다.

폴란드에서 1810년 3월 1일에 태어났고 누나와 여동생 2명이 있었다.

폴란드에서는 최고의 위인으로 기리는데 바르샤바의 관문인 공항의 이름이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이다.

1927년 만들어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피아노 분야 최고 위상의 콩쿠르로 알려져있다.

 

쇼팽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여 1816년 보이치에흐 지브니를 스승으로 두고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7살 때는 폴란드 춤곡(폴로네이즈) 두 곡을 작곡하였다.

이런 쇼팽의 재능은 바르샤바의 귀족들에게 알려져 공연을 다니며 알려졌다.

당시 폴란드 언론이

"천재는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만 태어나는 줄 알았는데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천재가 태어났다."

라고 극찬하였다.

쇼팽은 1818년에 오페라 작곡가 아달베르트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하였다.

1822년부터 바르샤바 음악원의 창설자인 유제프 엘스너에게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1825년 바르샤바 음악원을 다니던 15세에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앞에서 연주하고 다이아몬드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1828년 이후 음악원을 졸업하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가서 피아니스트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쇼팽은 클라라와의 사랑으로 알려진 독일의 작곡가인 로베르트 슈만과 동갑내기였다.

슈만은 음악 비평가로도 유명했는데 그는 비엔나에서 쇼팽의 연주를 듣고 "모두 모자를 벗어라. 천재가 등장했다."라는 표현으로 쇼팽을 극찬했다.

쇼팽은 "슈만은 나를 천치로 만들고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쇼팽의 조국인 폴란드는 그가 태어나 활동할 당시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게 분할 지배를 당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폴란드인을 혹독하게 탄압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폴란드인들이 영국, 프랑스,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쇼팽 역시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 정착하게 된다.

 

당대에 성공한 소설가로 문학계에서 인정받고 있던 6살 연상인 조르주 상드를 만나 사랑에 빠져 수 년 간 사귀게 된다.

몸이 약한 쇼팽은 상드의 헌신적인 돌봄 덕분에 10여 년 동안 연인 관계를 지속했다.

 

1838년 쇼팽과 상드는 요양을 위해 지중해의 마요르카 섬으로 가게 되었다.

버려진 발데모사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집에서 지내며 파리에서 마요르카까지 옮겨온 피아노를 치며 작곡을 했다.

그 해 유례없는 추위로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듬해인 1839년 상드의 고향인 프랑스의 노앙으로 옮겼다.


이후 그들의 관계는 나빠지고 쇼팽은 쓸쓸히 잊혀가다가 자기가 늘 동경하던 모짜르트 처럼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1849년 10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

멘델스존이 "그의 연주에는 근본적으로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매우 훌륭해서 그는 정말 완벽한 거장이라고 불릴만한 무언가가 있다." 라고 말할 정도의 천재 작곡가 쇼팽의 음악은 선율이 자유롭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유튜브 영상으로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 시대 쇼팽의 야상곡을 틀어놓고 까페에서 책을 읽는 호사를 부려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