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서리 소닌(赫舍里 索尼,혁사리 색니)는 강희제 초기 4대 고명대신이다.
고명대신은 황제나 국왕의 퇴임 또는 임종시 임금의 마지막 당부 및 유언을 받드는 대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청의 3대 황제였던 순치제가 천연두로 사망하면서 여덟살 어린 나이의 강희제를 보필해주길 4명의 대신들에게 부탁했다.
그들은 구왈기야 오보이(瓜爾佳 鰲拜, 과이가 오배), 나라 숙사하(納喇 蘇克薩哈, 납란 소극살합), 니오후루 어빌룬(鈕祜祿 遏必隆, 뉴호록 알필륭)에 소닌까지 4명이다.
소닌은 청나라의 개국공신으로 강희제 재위 당시 어린황제의 보필을 맡은 보정대신의 자리에서 국정을 운영한 인물이다.
또한 그의 셋째 아들 허서리 송고투(赫舍里 索額圖)는 강희제를 충실히 보필했으나 죄를 지어 사형당한 권신이고, 그의 장손녀이자 송고투의 조카는 강희제의 황후인 효성인황후 허서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이다.
소닌은 팔기군 중 황제 직속부대인 정황기(正黄旗)에 속한 인물로써, 젊은 시절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재위할 때부터 부친 쇼세(硕色)와 친척들로부터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를 배웠고, 청의 2대 황제 홍타이지(숭덕제崇德帝) 치하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1643년 숭덕제 사후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만주족의 관습이던 형제 계승을 내세워 숭덕제의 장남인 아이신기오로 후거(愛新覺羅 豪格)와 제위를 다투었지만, 둘의 세력이 비슷해 소닌을 불러 조언을 구했다.
소닌은 숭덕제의 여덟째 아들이자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의 아들인 6살 풀린을 황제로 세우도록 하였고 그가 순치제였다.
당시 실세였던 도르곤은 사촌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愛新覺羅 濟爾哈朗)과 함께 좌우섭정왕이 되어 순치제를 보필하는 역할을 맡았고, 순치제가 정식으로 즉위하자 지르갈랑을 몰아내고 단독섭정왕이 되었다.
1650년 도르곤이 죽고 순치제가 권력을 되찾자 소닌은 황제를 적극적으로 보필하였고, 효장문황후와도 적극적으로 교류하여 그의 신임을 얻었다.
그시절 소닌은 청나라 조정을 관장하는 내무부총관(內務部總官), 영시위내대신, 감국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순치제가 애첩 효헌단경황후 동고씨가 죽은 후 정치에 뜻을 잃자 오보이, 숙사하, 어빌룬과 함께 국무를 대신 처리하였다.
얼마 후 순치제가 24세로 죽자 이 4대 고명대신이 8살난 셋째 아들인 현엽을 제위에 올리니 그가 강희제이다.
강희제 초기 소닌은 고명대신 중에 서열이 가장 높았는데 나이가 60이 넘어 당시 기준 고령이라 병치레가 잦았다.
소닌이 자리를 자주 비우자 오보이가 그 자리를 장악하였다.
오보이의 권력욕심과 자만을 꿰뚫어본 소닌은 16살에 예정된 강희제의 친정을 2년 앞당겨 시행하였다.
소닌은 1667년 7월에 67세의 나이로 자연사하는데 그가 죽고 1달 뒤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했다.
소닌은 청나라 초기 나라가 자리를 잡는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신하로서 황제들을 보필하는 귀감이다.
모두가 어린 황제의 뒤에서 권력에 눈이 멀었을 때 사사로운 욕심없이 한결같이 정무에 임하였다.
나의 그릇에 맞게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비록 황제나 그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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