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중국] 최초의 유학자 _주공 단(周公 旦)

Jeffrey Choi 2021. 6. 29. 23:57

논어를 통해 공자(孔子)가 그의 꿈을 꾼지 오래되었다고 한탄하던 사람

어떤 이에게는 유교의 창시자로 불리는 사람

 

이 사람은 바로 주나라의 기틀을 세운 주공(周公) 단(旦)이다.

주나라는 황제 헌원의 후예라고 불리는 주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시조로 알려져있다.

그는 성이 희(姬)씨로 그가 이끈 일족은 현재 중국의 서쪽 땅에 정착하였다.

그의 손자인 창(昌)은 주 문왕(文王)으로 주나라를 하나의 국가로 부를 수 있도록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당시 은(殷)을 수도로 하는 상(商)나라가 천하를 호령하고 있었고 상나라 주왕(纣王)이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문왕은 이를 안타까워 하다가 주왕에게 잡혀 유리성에 7년간 구금되었다.

이후 풀려난 문왕은 주왕을 버린 민심을 자신이 수습하였고 강태공으로 불리는 강상(姜尙)을 얻어 중용하고 제후들의 마음을 얻었다.

문왕이 상나라를 멸할 기틀을 마련해두고 죽고 그의 뒤를 이어 발(發)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주 무왕(武王)이다.

 

무왕은 강상과 단(旦)의 보좌를 받아 국력을 길러 BC.1046년 상나라를 멸망시킨다.

단은 문왕의 넷째아들로 무왕의 동생이다.

자신의 영지가 주에 있고 작위가 상공이어서 주공(周公)이라고 부른다.

 

무왕이 상나라를 칠 때 천하 제후의 마음을 얻으라는 단의 조언에 상당히 기대었으며 그 덕에 포악한 주왕을 토벌하면서 하늘의 뜻을 받들었다는 것을 강조하여 민심을 잡았다.

 

단은 형인 무왕이 천하를 잡은지 3년만에 죽자 아직 어린 형의 아들인 송(誦)을 대신해 7년간 섭정을 하였다.

아직 중앙집권통치가 어려운 시기라 넓은 영토를 유력자들에게 나누어주어 독립적으로 통치하게 하는 봉건제를 시행하였다.

이때 제후들에게 나누어준 땅이 130개 ~ 180개로 추산된다고 한다.

주공 단이 섭정을 펼치는 시기는 역성혁명으로 주나라가 패권을 잡은지 얼마되지 않았기에 여러군데서 반란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것이 상나라 후예들에게 봉읍으로 준 송나라를 감시하기 위해 보낸 자신의 형제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이 일으킨 반란이다.

그는 삼감(三監)의 난(亂)으로 불리는 이 반란을 평정하고 영토를 황하 중류에서 황해까지 넓혔다.

그외 종법제도, 분봉제, 적장자 계승법, 정전제 등을 시행하며 주나라의 법령을 정비하였다.

 

그는 후에 성왕(成王)이 되는 조카 송을 가르쳤는데 이때 성왕이 잘못하면 자신의 아들인 백금을 회초리로 때렸다.

백금이 후에 노나라 제후로 임명되어 떠날때 교만하지 않도록 당부하기도 하였다.

 

유학은 공자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인 경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공자(BC.551~479)보다 시대가 훨씬 앞선 주공 단(BC.1100(?)~1030(?))이 활약하던 시대에 유학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최초의 유학자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는 이유는 유학의 시조라 불리는 공자가 그를 사모하였던 점이다.

 

주나라 건국 당시 인간의 삶에 윤리를 찾기 어려웠던 사회환경 속에서 유학의 핵심인 도덕에 대해 강조하고 실천한 사람이 주공 단이었다.

삶의 기준을 마련해주고 백성을 근본에 두고 교만을 멀리하고 성품을 길러 몸과 마음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가 실천으로 보여준 유교적 통치 방법이 공자에 의해 다듬어지고 파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