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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진(秦)의 공격을 막은 신릉군과 춘신군 _전국사군(戰國四君)2

Jeffrey Choi 2021. 5. 13. 14:07

신릉군(?~BC.244년)은 이름이 '위무기'로 위나라의 정치가였다.

 

성품이 인자하고 겸손하고 선비들을 잘 대우하여 식객이 3천에 달하였다.

형인 위나라 안리왕과 바둑을 두고 있다가 조나라 군대가 국경으로 밀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 왕이 어쩔줄 모르자 신릉군은 사냥 나온 것일 뿐이라며 태연히 바둑의 돌을 놓았다고 한다.

 

식객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 초한쟁패기(BC.206~BC.202년)에 유방의 편으로 활약했던 장이가 있고 동시대에는 후영이라는 사람이 있다.

후영은 현인으로 소문났지만 나이 든 성문지기에 불과하였다.

신릉군이 그를 모시러 가자 마차 귀빈석에 올라 앉아 한참을 백정 친구인 주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릉군은 싫은 내색없이 기다렸다가 술자리로 그를 데려왔는데 그때 후연이 신릉군의 덕을 알리기 위해 버릇없이 굴었다며 일의 경위를 설명하면서 그의 식객이 되었다.

 

장평대전 이후 진(秦)나라가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하자 조나라 평원군이 처남인 신릉군에게 도움을 청한다.

신릉군은 구원을 하고자 하였으나 형인 안리왕은 진나라의 협박으로 출병을 하지 않았고 이때 식객인 후연이 묘책을 꺼낸다.

병사통제권을 의미하는 호부를 평소 신릉군을 은인으로 여기던 안리왕의 애첩을 통해 얻게하고 출병을 방해하던 위군 지휘관 진비를 백정 주해가 철퇴로 쳐죽이게 한다. 

이렇게 신릉군이 왕의 허락없이 끌고 간 위군 8만명은 조나라를 구원하게 되었으나 정작 신릉군 자신은 돌아갈 명목이 없어 조나라에 10년간 망명하게 된다.

 

신릉군은 식객들을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아끼고 의기투합하였는데 평원군이 이를 우려하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지위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며 평원군과 연을 끊어야 겠다며 오히려 식객을 두둔하였다.

이 사건으로 평원군의 식객 절반이상이 신릉군의 식객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수십년 후 죽은지 한참 되고 자신의 나라도 없어져 관리가 안되던 신릉군의 황폐한 묘지를 신릉군의 팬이던 한고조 유방이 따로 돌보게 하기도 하였다.

 

춘신군(?~BC.238년)은 이름이 '황헐'으로 초나라의 최고위 정치가인 상방이였다.

 

전국4군 중에서 유일하게 왕족 출신이 아닌데 초의 경양왕의 신하였다가 진에 볼모로 잡힌 태자를 초로 탈출 시키는 등의 공을 쌓아 태자가 고열왕이 되자 제상에 올랐다.

 

진(秦)나라에 맞선 합종군, 즉 6국의 연합군을 이끌어 조나라를 구원하였다.

춘신군의 영지는 수춘으로 후에 초한쟁패기 시절 항우가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그가 거느린 식객의 규모는 잘 알려지지 않는데 주영이라는 식객이 이름이 알려져있다.

그는 고열왕의 첩과의 관계에서 아들이 있는 춘신군에게 첩의 오빠인 이원을 조심할 것을 경고하였다.

고열왕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면 왕가의 핏줄이 끊길 것을 염려한 춘신군이 왕제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하였는데 이를 반대한 이원에게 결국 살해당한다.

춘신군의 아들은 고열왕의 뒤를 이은 초유왕이 되었고 꽃이 핀 나무를 다른 나무에 접붙였다고 하여 '이화접목(移花接木)'이라는 고사로 남았다.

 

전국4군은 진(秦)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재상들이다. 

왕에 버금가는 세력을 거느렸고 백성들의 신망도 얻고 있었다.

이들이 추구한 능력위주의 인재활용과 특권층이라는 권력을 내려놓는 활약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다.

전국시대는 강력한 법치주의 국가가 되어 기존의 통치체계를 바꾸고 왕이 솔선한 진나라와 뛰어난 정치가들은 있었지만 여전히 기득권을 유지하던 다른 6국과의 치열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진이 중국 최초의 통일을 이뤄내면서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