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환공(桓公)이라는 패자를 만든 제나라의 시조
실질적, 경험에 근거한 경세실용(經世實用) 문화를 만든 사람
이 사람은 바로 주(周)나라의 상(商)나라 정벌에 빼놓을 수 없는 공을 세운 태공망(太公望) 즉,강상(姜尙)이다.
주나라 문왕이 상을 멸망시키기위해 고민하던 시기 사냥을 하러 갔다가 낚시를 하던 강상과 만났다.
강상은 문왕을 만나기 전 10년간 위수(渭水,웨이수이) 강가에서 낚시를 하며 자신이 활약할 때를 기다렸는데 위수는 황하의 최대 지류로 유명한 도시로는 천수(톈수이), 장안(시안)이 이 강을 끼고 있다.
이때 무왕이 낚시와 정치가 무엇이 비슷한지 물었고 강상은 낚시에는 세가지 심오한 이치가 숨어있음을 말했다.
첫째는 미끼로 고기를 낚는 것으로 녹을 주어 인재를 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요.
둘째는 좋은 먹이로 더 큰 물고기를 낚는 것인데 이는 녹을 많이 줄수록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스런 신하가 나오는 이치이며,
셋째는 물고기 종류에 따라 요리법이 다르듯 인재의 성품과 됨됨이에 따라 벼슬을 달리 맡기는 이치와 같다고 설명하였다.
이에 감탄한 문왕에게 발탁된 후 함께 천하를 도모하기로 하였고 강상은 이전의 궁핍하던 생활을 접고 자신의 뜻을 펴는 삶을 살게된다.
후세는 이를 궁팔십달팔십(窮八十達八十)이라고 한다.
문왕은 매일아침 조회를 마치면 각료들과 강태공의 강의를 들었고 강태공은 절기를 살펴 농사짓는 법부터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법까지 가르쳤다.
문왕이 상나라 폭군 주왕에 의해 유배되자 미녀를 바치게 하여 유배에 풀려나게 하고 제후들을 결속시켜 천하의 2/3를 주나라를 따르게 만들었다.
문왕이 죽자 그의 아들 무왕을 보좌하였고 무왕 13년에 상나라를 정벌한다.
이때 상의 충신인 백이와 숙제를 살려주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인(仁)이라기보다 지(智)에 근본을 둔 의로운 행동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다른 제후들과 천하 인민이 감동하여 복종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강상은 주의 재상으로 지내며 중국의 대표적 병서 7종에 들어가는 육도와 삼략이라는 병법서를 썼다.
육도는 권모술수(權謨術數)를 의미하는 도(韜)를 '문도(文韜)·무도(武韜)·용도(龍韜)·호도(虎韜)·표도(豹韜)·견도(犬韜)'의 6개 장으로 나누어 기술되어 있으며 주 무왕과 강상의 문답형식으로 되어있다.
삼략은 '상략(上略), 중략(中略), 하략(下略)'의 3개의 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육도의 내용이 전술을 다룬다면 삼략은 전략을 다루고 있다.
무왕이 상을 멸망시키고 나서 공신들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의 다섯 등급의 작위로 나누어 영토를 분배할때 강상은 산동지역의 땅 백리의 영토를 받고 제(齊)의 제후로 봉해졌다.
제나라에 부임한 강상은 많은 이민족의 항거에도 정치를 개선하고 풍속을 존중하고 예의를 간략히 하여 모두 제의 문화에 동화할 수 있도록 힘을 썼다.
같은 시기 주의 실권자인 주공 단이 인의와 덕으로 다스리는 것과 달리 강력한 법으로 다스리고 극형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가, 병가, 법가 등 많은 학파들이 강상을 선조로 모셔 백가종사(百家宗師)라고도 불린다.
후대의 손자의 역시 병법을 쓸 때 육도삼략을 근간으로 하여 썼다고 한다.
낚시꾼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세월을 낚는 강태공의 이미지와 달리 정치의 전면에서는 칼같은 날카로움과 번뜩이는 판단력, 지(智)에 바탕을 둔 덕치 등 정책이 미칠 영향을 철저히 계산한 강상은 중국에서는 무신(武神)으로 받들여지고 있으며 실리주의자로서도 후대에 큰 귀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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