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사건

[유럽] 모라비안(Moravian)과 선교

Jeffrey Choi 2021. 11. 20. 08:25

모라비안 형제회(이후 모라비안)은 체코 서부 보헤미아 지방의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신교들이다.

독일의 귀족 진젠돌프가 자신이 구입한 땅에 이들이 거주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이 개신교들의 출신이 주로 체코의 동쪽인 모라비아라서 그렇게 불리었다.

여기서 알아볼 인물은 얀후스와 진젠돌프 백작(Nicholas von Zinzendorf)이다.

 

얀 후스는 종교개혁자로 1373년에 태어나 1415년에 생을 마쳤다.

그 시절 복음은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는데 그가 나와 누구든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성경만이 믿고 의지할 대상이라고 외쳤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자 당시 가톨릭교회는 발언을 취소하지 않으면 화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하였고 그는 화형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진젠돌프 백작은 1700년에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사망하고 어머니가 재가하여 할머니와 숙모의 품에서 자랐다.

그의 할머니는 독일의 엘리트층으로 대학교수들과 많은 교제를 하면서 경건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진젠돌프도 경건주의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

그는 대학시절 하나님을 연구하고 헌신의 생활을 유지하며 성경읽기 운동을 하였는데 외국선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대학에서 3가지 결단을 한다.

첫째 나는 한 사람 한사람을 예수님처럼 대하면서 친절하게 내 삶을 그들을 위해 바친다.

둘째 어떤 일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충성하는 삶을 산다.

셋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세계까지 전파한다.

 

진젠돌프는 할머니의 권유로 변호사가 되어 그 일을 하면서 커다란 영지를 사서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을 주일에 초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1722년에 순교자 얀 후스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핍박을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 200여명을 자신의 영지에서 살도록 하였다.

이곳을 주님의 보호(Lord’s Watch)라는 뜻을 가진 헤른후트(Herrnhut)라고 부르며 모라비안 공동체가 사도행전의 교회처럼 온 교회가 성령 안에서 가족처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장시키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이끌었다.

이들은 하루에 3번씩 기도를 하였는데 1727년 7월 16일, 7월 22일, 8월 5일 기도 중에 성령이 임함을 느끼며 점점 뜨겁게 기도와 회계를 하였다.

8월 10일에는 밤 늦게까지 기도하고 찬송하며 눈물로 간구하였고 8월 13일에는 온 회중이 성찬식을 하면서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가 온 회중에게 임하여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수 많은 사람이 감격을 나눈 그 날을 ‘헤른후트의 오순절’ 또는 ‘기념의 날’이라고 불렀다.
8월 13일부터 26일까지 13일 동안 24명의 남자와 24명의 여자들이 하루 한 시간씩 24시간 연쇄기도를 하였고 얼마후 77명이 연쇄기도에 참여하였다.

이 날 이후 모라비안들은 복음을 들고 세계로 나가는 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1732년부터 1760년까지 28년간 모라비안 교회는 226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이는 종교개혁 이후 모든 개신교가 파송했던 선교사 수보다 많은 수였다.

1734년에 목사가 된 진젤돌프는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귀족의 지위를 버리고 1760년 작고하기 전까지 예수를 설파한다.


모라비안 선교회는 1930년까지 3,000명의 전임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교인 12명 중 1명 꼴로 선교지로 나갔다.

그들은 선교지에서 섞여살며 희생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몇가지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1733년에 덴마크령 그린랜드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얼음으로 뒤덮인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때로는 굶어죽고 때로는 핍박을 받았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증거 했던 복음 때문에 에스키모 인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시작했다.

 

1735년에는 영국에서 감리교를 세운 요한 웨슬리가 찰스 웨슬리와 함께 미국 조지아주로 부터 초청을 받아 선교사로 대서양을 항해하는 배를 탔을 때 배가 금방 파선될 것 같은 심한 폭풍을 만나 모두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 때 배 안에서 전혀 당황하지 않고 평화롭게 찬송하는 무리들을 발견했는데 그들이 바로 미국의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나는 26명의 모라비안 형제단들이었다.

진젠돌프가 코펜하겐 왕실 대관식에 참석했을 때 만난 노예들에게 그들의 비참한 삶을 듣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위한 삶을 살아갈 선교사를 모집하였는데 그때 자원한 26명이 이들이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요한 웨슬리는 모라비안 지도자들과 계속 교제를 나누게 되었고,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 1738년 5월 모라비안들의 부흥집회에 참석했다가 뜨거움을 체험한 후에 변화를 받고 영국을 뒤흔드는 전도자로 쓰임받게 된다.
모라비안의 영향을 받은 요한 웨슬리는 일생동안 말을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일기장에는 “아침 7시 30분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 3,500명 모임. 오전 11시에 가서 주의 복음을 증거하다. 2,500명 모임. 오후에 티타임을 하고 4시에 다시 복음을 전하러 가다. 2,500명이 모임.”이라고 적혀있었다.

 

인도에서 활동한 영국 침례교 선교사이며 사회개혁가인 윌리엄 캐리가 1793년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기 60년 전에 이미 모라비안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도와 중국 등으로 떠나있었다.

모라비안들은 선교를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라비안 교회에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선교였다.

예수님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말씀을 충실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