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사건

19세기 초 영국의 곡물법 논쟁과 지금의 시대상

Jeffrey Choi 2021. 7. 31. 00:35

1800년 대 초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도시화의 진행과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농업기술의 발달이 더뎌졌다.

게다가 1815년 6월 워털루전투 종료까지 10년 간 계속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곡물의 수요가 높아져 곡물가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뛰었다.

이로인해 영국의 지주 계층은 막대한 이득을 보게된다.

 

하지만 길었던 전쟁이 끝나고 곡물의 수요가 줄자 막대한 부를 얻던 지주층에서 기득권 보호를 위해 움직인다.

자영농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입산 곡물에 관세를 매기는 곡물법이 시행된 것이다.

이 법은 곡물 1쿼터 당 80실링이 될 때까지 수입을 금지하는 것이 주된 내용인데 결과적으로 80실링이 너무 높은 가격이라 한번도 이를 넘어간 적이 없었다.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곡물법은 1815년부터 1846년까지 유지되는데 1828년 곡물가격 변화에 따라 관세율도 변화시킨다는 수정조항을 마련했지만 이 기간 내내 도시의 노동자들은 풍,흉년에 상관없이 늘 영국의 밀로 생산된 비싼 빵을 사먹어야 했다.

영국은 기본적으로 섬나라이기에 선박만 통제한다면 수출입을 대륙국가에 비해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주들이 주축이 되는 보수당(토리당)은 곡물법을 찬성하고 부르주아 산업계층이 주축이 되는 자유당(휘그당)은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였다.

덮어놓고 애를 낳다가는 망한다는 이론인 맬서스 트랩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토마스 맬서스는 곡물법을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곡물가격이 하락하면 국내 농업에 타격을 주고, 식량공급에 차질이 발생하여 식량부족을 대비할 수 없기에 경제가 불안정해지고 농업자본은 위기에 처한다는 논리였다.

 

반면 비교우위를 제창했던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곡물법은 악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곡물의 수입으로 곡물가격이 하락하면, 농민들의 임금이 하락하고, 임금이 하락하면 자본가들의 이윤이 증대하고 인윤 증대로 인한 축적된 자본은 고용기회를 확대하여 노동자의 삶이 나아진다는 논리였다.

 

이로부터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논쟁은 활발하다.

국제 곡물가격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들은 값싼 곡물로 약소국의 식량생산 시스템을 돌이킬 수 없도록 파괴시켰다.

싼 곡물의 무분별한 수입이 어떤 독이 되어 돌아왔는지는 2008년과 2011년에 있었던 곡물가격의 급격한 인상을 통해 알 수 있다.

붉은 색 동그라미쳐진 시기에 식량생산 시스템이 파괴된 저개발 국가에서 붉은색 작은 점들의 숫자만큼의 식량과 관련된 폭동이 일어났다.

각 나라들의 이름 옆의 괄호로 된 숫자는 폭동으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이다.

 

리카드로의 이론은 세계가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갈 때는 이상적이지만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하고 앞으로 기후와 시스템이 어찌 변할지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는 맬서스처럼 일부의 희생이 있더라도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정책이 유지될 필요도 있다.

 

곡물법은 당시 영국의 여러 사회상을 바꿨는데 힘이 없어 비싼 빵을 사먹던 노동자들이 선거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고 참정권 확대를 주장하게 되어 1884년에 이르러 노동자의 선거권이 보장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곡물법 폐지 이후 1861년에서 1865년까지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에서 영국이 중립을 지키게 된 이유도 자국 곡물의 약 30%를 미국 북부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수입하고 있었기에 전통적 영국 식민지 성향이 강한 남부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