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전들은 현대인들이 읽었을 때 당연한 듯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만큼 일상 생활에 그들의 말이 통용되고 있고 녹아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고전들을 하나씩 놓고 보았을 때는 이름만을 알 뿐 각기 정확히 어떤 내용을 풀어내는지는 붙잡고 읽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강신주 작가는 노자와 장자를 정확히 구분하여 그 특징을 서술해 주고 있다.
노장사상이라고 한 묶음으로 처리하기에는 둘 사이에 간극이 꽤 크기 때문이다.
노자는 역사를 국가의 흥망성쇠로 본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은 국가를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는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국민에게 수탈하고 그것을 골고루 재분배한다.
자연의 법칙은 부족하면 채우고 더하면 덜어내는 데 인간사회에서는 국가가 그 역할을 한다.
남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가져와서 부족한 사람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국가의 정점에 있는 통치자는 재분배를 중요시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재분배는 피통치자를 사랑해서 그런게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빼앗기 위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60~70년대 경제개발이 누군가의 종신집권을 위한 계획중에 일부여도 이상하지 않는 것이다.
그외 중국에서의 천하는 '하늘 아래'라는 뜻으로 통일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는 것과
자본주의는 취업하지 않으면 소비를 할 수 없는 시스템이고 소비할 대상은 내가 일하는 기업에서 생산하는 물건이라는 아이러니 등을 노자를 통해 사색할 수 있다.
결국 노자는 '주체로 살것인가? 객체로 살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장자는 타인과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밤나무 동산인 조릉에서의 에피소드가 대표적인데 나무에 앉은 매미를 노리는 사마귀, 사마귀를 노리는 까치, 까치를 노리는 사람, 그 사람을 보고 있는 조릉의 관리인이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세상은 타자와 엮여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좋던 싫던 공동체에 속한다.
대표적으로 서양의 경우 동일성을 중시하는 공동체이다.
거기서 의자라고 하면 그 모양이 의자 같은 것이 중요하다. 4개의 발이 있지 않으면 의자라 불리지 않는다.
동양의 경우 관계를 중시하는 공동체이다.
여기서는 앉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생기든지 의자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현대인들은 장자를 중국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본명이 장주인 장자는 자신의 출신지역을 고려해 본인을 중국대륙 내 수많은 나라 중 하나인 송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를 사는 우리도 후손이 보았을때는 한국인이 아니라 그저 지구인일 수 있다.
그외 우리는 우리의 삶이 보편적이라 생각하지만 다른 공동체에서 보았을 때는 생소한 삶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과 어떤 공동체든 누군가가 그 속에서 유명해지면 그는 공동체의 규칙에 더 강하게 얶매이게 된다는 점 등이 사색의 포인트이다.
두 저서의 겉을 핥아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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