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생각과 관심사

트렌드와 함께 숨을 쉰 이어령

Jeffrey Choi 2022. 2. 27. 07:09

이어령 작가가 2022년 2월 26일에 별세하였다.

그는 1933년생으로 알려져있고 대한민국 문학사에 족적을 남긴사람이다.

 

그는 항상 젊은 생각을 유지하려고 하였고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였다.

유연하려고 노력하였고 트렌드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고령에도 늘 책과 컴퓨터에 둘러쌓여 지냈다.

 

2010년 출판된 그의 저서 '유쾌한 창조'에 쓰인 소개 문구가 그를 잘 말해 준다.

 

"따를 자 없는 달변가, 파격적인 문학평론가, 문학 출판사의 주간, 대학교수, 당대의 문장가 그리고 88 올림픽을 통해 전세계에 우리 문화를 과시한 초대 문화부 장관. 이어령을 수식하는 말은 이처럼 다양하다. 그는 자신이 곧 문화코드로 작용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연줄을 만들고 남을 지배하는 것을 혐오하여 값싼 패거리주의에 빠지지 않은 유일한 지식인이기도 하다. 서울대 문과 시절, 교수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며 이미 여러 강연회에 불려 다니던 그가 이제는 전설적인 제목이 된 ‘우상의 파괴’로 문단에 등장하여 파란을 일으킨 것은 고작 24세였다. ” ‘우상의 파괴’ 읽어봤나?”라는 말이 인사말로 통할 지경이었다니 그 여파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던 그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일간지에 발표하면서 최초로 한국 문화를 제대로 분석해 냈다고 평가받아 독보적인 위상을 획득했다. 그리고 40대에는 ‘축소 지향의 일본인’를 일본에서 출간하여 미국 등 세계에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까지 문학, 어학, 풍속학, 문화분석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도 이렇다 할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다.문학평론가, 소설가, 에세이스트, 희곡작가, 시인, 대학교수, 언론인이다. 문화부장관을 지냈으니 행정가에, 올림픽 행사를 기획했으니 문화기획자라고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밀리언셀러를 가진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이어령의 이런 다양한 이력을 ‘간단하게’ 정리해도 다음과 같다.1933년 12월 29일에 태어났다. 그러나 호적에는 1934년 1월 15일로 올라 있다. 1956년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문학예술》지를 통해 등단했으며,〈우상의 파괴〉를 발표했다. 1960년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를, 1987년에 단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부터 이화여대와 인연을 맺어 석좌교수, 석학교수를 거쳐 2001년에 스스로 퇴직했다. 1990년에는 초대 문화부장관을 역임했고, 2009년에는 경기도 디지로그 창조학교를 설립, 명예교장을 맡고 있다. 1960년, 28세라는 젊은 나이에〈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조선일보〉〈한국일보〉〈중앙일보〉〈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72년,《문학사상》을 창간호부터 1985년까지 주간으로 지냈다. 2007년부터 지금까지〈중앙일보〉 고문을 맡고 있다. 1988서울올림픽 때는 개·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90~1991년까지 초대 문화부장관이었으며, 1999년에는 대통령 자문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2002년 월드컵 조직위원회 식전문화 및 관광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아 활약했다. 2010년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어령은 소설, 에세이, 희곡, 시 등 거의 모든 장르에 작품을 남겼다. 저서는 거의 100여 권에 이른다. 다음은 저서의 일부 목록이다. 오래된 저서는 출판연도와 출판사를 달리해서 계속 재출간되었기 때문에 연도와 출판사 이름은 적지 않았다. 일본어로 쓰여진 저서도 빠졌다. 《지성의 오솔길》《저항의 문학》《흙 속에 저 바람 속에》《바람이 불어오는 곳》《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노래여, 천년의 노래여》《장군의 수염》《환각의 다리》《기적을 파는 백화점》《축소지향의 일본인》《공간의 기호학》《디지로그》《젊음의 탄생》《지성에서 영성으로》"

 

짧게 줄여 이 정도인 그의 이력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다.

 

그는 여든 아홉 사망 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60대만 되어도 버거워 하는 PC와 태블릿을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그는 윈도ME, 윈도XP, 윈도10이 각각 깔려있는 PC를 소유하고 있고 일본어 검색용 PC를 한대 더 가지고 있다.

이 컴퓨터들은 스마트 싱크라는 프로그램으로 상호연동된다.

종이에 글을 쓰면 컴퓨터에 바로 입력되는 볼펜을 사용하고 세로로 세운 모니터와 넷북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의 책상은 그 어떤 사람의 책상보다 넓은데 그의 유일한 호사(豪奢)였다.

젊어서 세계를 제패한 알렉산더 대왕이 말등에서 업적을 이뤘던 것과 같이 현대시대 학자의 말등이나 마찬가지인 책상에 대한 욕심은 있었다.

 

이어령은 79세이던 2011년에 이미 테블릿PC의 자판 인터페이스에 대해 혁명이라고 하며 우리사회가 창조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 틀에 박힌 관념만을 강조하지 않아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그는 생전에 창조를 강조하였는데 창조와 항상 따라다니는 파괴에 대해서도 고찰을 하였다.

1956년 24살 때 우상의 파괴라는 논설을 한국일보 문화면에 게재하면서 권위주의 가득한 기성 문단을 파괴해야 창조적인 진정한 문학이 꽃피울 것이고 말한 것이 시초이다.

 

그는 살아생전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못 보낸 것을 아쉬워했다.

자녀들은 시대의 석학이었던 아버지가 글쓰는 뒷모습을 보며 자랐다.

그래서 그가 장녀 이민아씨가 위암에 걸리자 그녀의 요청으로 2007년에 신앙인이 되었다.

그는 '지성에서영성으로'라는 책에서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믿음을 얻을 수 없다고 했다.

지식을 얻으면 얻을 수록 종교에 대해 불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 사람일 진데 그가 장녀 이민아씨를 2011년에 잃은 상실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나는 평소에 운전하면서 항상 거슬리는 것이 여기서부터 램프구간 이란 말이다.

램프라는 외래어를 경사로 혹은 비탈길로 바꾸고 싶다.

이어령은 장관시절 노견을 갓길로 바꾸었다.

힘이 있는 사람도 막상 그자리에 가면 하기 어려운 일일텐데 실행력을 본받고 싶다.

 

그는 어린시절에 또래아이들과 함께 놀지 못하고 멀찍히 언덕위에 앉아 노는 것을 바라보면서 부러웠다고 회상하였다.

그래서 생전에 외로움을 많이 탔으며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힘들어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창조학교'를 만들어 한국 사회에 창조의 밑거름을 뿌리고 싶어하였다.

 

이제 이어령이란 지식인은 더이상 만날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대한민국에 창조를 심어나가야 하겠다.